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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한자

8. 기구한 운명-한글의 역사

 

 

한글은 우리 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가장 뛰어난 우리 문화의 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은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반대와 업신여김, 천대 속에서 기구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서기 1443년 세종 25년 12월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를 선포하자 곧이어 최만리 등 신하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훈민정음을 만든 세 가지 뜻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뜻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우리말은 중국과 달라서 중국 글자인 한자로는 제대로 우리말을 적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우리 글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한자는 본디 어려운 글자이기에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없고,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해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서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든 것이다.

셋째,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고 소통하게 하자는 것이다.

 

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최만리의 반대 논리

그러나 최만리 등은 여섯 가지의 반대 논리로 세종에 맞섰다.

첫째, 언문은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고 중화의 근본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대 문화의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성현의 글자인 한자를 버리고 언문을 쓰고자 함은 문명의 중심인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다.

셋째, 쉬운 언문을 쓰게 되면 관리들이 학문을 제대로 닦지 않고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시정의 상말만 쓰게 돼서 상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다.

넷째, 언문은 신기한재주에 지나지 않으니 학문에 손실이 크고 정치에 이로움이 없다.

다섯째, 말과 글이 같아지고 쉬운 언문을 쓴다고 해서 형법과 옥사의 공평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언문의 사용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데 중국에 묻지 않고 바꾸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에 어긋나는 일이다.

반대 상소에 앞장선 최만리는 세종에 대한 충성심이 없거나 경박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하고 학문에 밝은 선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단호하게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한자만이 유일한 글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들 앞에 훈민정음을 내놓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진심으로 세종과 나라를 위해서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대부들 모두 최만리와 같은 생각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대부들이 최만리와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에게 한자는 문명을 상징하는 유일한 글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그때까지 천년 동안 사대를 해 온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고 사람의 도리와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도 한자를 통해서 중국에서 배우고, 공자 맹자 등 중국 성현들의 가르침을 한자로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한자야말로 사람의 도리가 어때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깊은 뜻을 가진 글자이기에 한자의 권위를 손상시키거나 또 하나의 새로운 글자를 쓰자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문화에서 벗어나면 야만이라는 사대주의 사상 뿌리깊어

 

그들은 훈민정음이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고 중화의 근본에 어긋나서 사대 문화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 당시까지 중국의 제도가 세상의 기본이고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며, 중국의 문화에서 벗어난다면 바로 야만이라는 사대주의 사상이 조선의 지도층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자만이 학문을 닦는 글이라는 사상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래서 그들은 중국 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훈민정음을 사대 문화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중국 문화에서 벗어남은 바로 야만인이 되겠다는 것임으로 중국에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훈민정음을 쓰면 관리가 제대로 학문을 닦지 않고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상말만 쓰는 상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 주장은 현재의 한자 옹호론자들과도 아주 빼닮은 생각이다.

그들은 한자야말로 학문을 제대로 닦는 길인데 한자가 아닌 것은 글이 아닌 것이며, 참된 글이 아닌 언문으로는 절대로 학문을 닦을 수 없는 것이며, 학문을 깊이 공부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한자야말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사람됨을 바르게 가르치는 글이므로 한글만 가르치면 바로 상말만 쓰는 상스러운 나라가 된다고 믿고있다.

그런 사상은 조선 5백 년을 관통한 후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요즘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사상에 젖어 있기에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도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② 조선 내내 계속된 한글 천대

 

세종 대왕은 최만리 등의 반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신하들과 토론도 하고 질책도 하면서 훈민정음이 널리 쓰이도록 밀고 나갔다.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짓고 정인지, 최항 등에게 중국의 운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했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3년 후인 1448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완성하고 문관 채용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도록 했다. 그리고 한자음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서 동국정운을 짓고, 갑인체 활자로 석보상절도 간행했다.

그러나 세종의 그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은 사대부들의 사대주의와 한자 숭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조선이 망할 무렵까지 거의 죽은 글자로 버려지고 천대받는 글자로기구한 운명을 겪는다.

 

쌍글, 암클이라는 이름으로 멸시받은 한글

 

훈민정음은 조선 시대 내내 언문이나 쌍글, 뒷글, 암클이라는 멸시받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전혀 쓰지 않는 천한 글이라는 대접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친구나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글짓기 내기를 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그때의 글짓기는 당연하게 한자로 시문(詩文)을 짓는 것이었고, 그 시문은 바로 중국의 이름 있는 문인들의 글이 본보기가 됐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중국에서 이름있는 사신이 왔다고 하면 한양에까지 올라가서 글을 겨루고 사신에게 자기 글에 대해서 자문을 받는 일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 사상과 한자 숭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훈민정음은 16세기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이나 송강가사, 고산 윤선도의 국한문 혼용으로 지은 시조나 가사, 김만중의 구운몽에 등장했다. 서포 김만중은 “ 우리 통속 소설들은 모두 언문으로 쓰여져야 한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또 인현왕후전, 한중록 등 궁중 여인들의 글에 쓰여져서 암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잠깐씩 등장한 경우이며, 조선 말기까지 일반에 널리 쓰이지 못하고 나라글로도 전혀 쓰이지 못한 채 버려진 글로 지내 왔다.

 

③ 한글의 대중화-서양 선교사들의 역할

 

한글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서양의 선교사들 덕분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버려둔 것을 난데없이 서양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대중 앞에 들고 나타난 것이다.

 

한국 문학이 등장할 수 있을까 걱정한 춘원 이광수

 

우리 나라 문학을 개척한 춘원 이광수는 1917년 잡지 ‘청춘’ 7월호에『야소교(예수교의 옛말)의 조선에 준 은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 언문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들에게 심어준 것은 야소교회외다. 성서와 찬송가가 언문으로 번역되매 비로소 언문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이외다.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면 문학사 제 1장에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 ”

 

선교사들이 볼 때도 너무 기막힌 한글 천대

 

1838년 프랑스 신부 엥베르가 교황청에 보낸 서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조선사람들은 그들의 모국어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데 적합한데도 자기 고유의 말을 멸시한다. 그들은 한문 서적만 쓰고, 번역하지 않은 상태로 발음만 옮겨서 뜻도 모르면서 기도하고 있다. ”

프랑스 선교사 달레는 한양을 둘러보고 “ 조선 정부가 설립한 경성의 큰 학교 여덟 곳 모두 중국 문학과 중국 과학을 가르칠 뿐 조선어는 업신여긴다. ”고 말했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눈에 보물로 보인 한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96년 선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글과 우리말이 얼마나 천대받았는지 알 수 있다.

“ 조선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개 한자를 쓰고 여인들은 거의 문맹이었다. 언문이라는 쉬운 글자가 있는데도 이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든 책은 한자로 쓰여 있는데 이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라틴어로 출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은 성경과 찬송가는 물론 모든 기독교 서적을 조선의 글로 출판해서 쉽게 읽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문맹도 퇴치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임을 깨달았다. 언문은 아주 쉬워서 여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다. 성경과 찬송가를 언문으로 출판하면 우리 선교 사업에 상상도 못할 결과를 얻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하면 글을 모르던 사람들도 머지않아 글을 깨우쳐 읽고 쓸 것이다. 유식한 사람들이 한자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은 언문으로 된 성경을 읽을 것이다. 이는 선교사들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큰 선물이다. 선교사들도 몇 시간만 언문을 배우면 찬송과 성경을 읽는 것은 물론 조선말도 배울 수 있다. ”

서양인의 눈에도 한국인들에게 한자로 된 책은 미국, 영국인들에게 라틴어 책을 보게 하는 것처럼 황당하게 보였던 것 같다.

 

우리가 버린 한글을 선교사들이 세상에 내놓다

 

한글을 발견한 선교사들은 ‘조선어 첫걸음’ 등 우리말 교재도 만들고 성서 번역 위원회도 만들어 앞다퉈 성서와 찬송가를 번역해서 선교에 나섰다. 한글로 된 성서와 찬송가가 퍼지면서 기독교 신자들은 한문 성경으로 포교할 때보다 수십 배 늘어났다.

 

그때의 경험으로 기독교 계통 학교들은 일제 시대에도 학교에서 열심히 한글을 가르쳐서 우리 나라 한글 교육에 앞장서게 된다. 한글의 대중화가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됐음은 그동안 우리 나라 지식인들이 한글을 얼마나 배척해 왔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1898년부터 1902년 사이에 독립 협회 사건으로 종로 형무소에 수감된 이승만과 안동수, 이동명, 이상재, 이원긍, 주시경 등 많은 독립 투사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감옥에 넣어준 한글 성경을 읽고 이승만을 비롯해 상당수가 기독교인이 됐다.

 

불교계도 만일 조선 시대에 선각자가 나와서 중국 사람이 쓴 어려운 한자 불경 대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한 불경을 쓰도록 했다면 불자들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을 것이다.

 

④ 일제 강점기에 보물이 된 한글

 

훈민정음 반포 이후 줄곧 고난의 역사를 이어오던 한글은 역설적으로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한국 전쟁 때까지 민족의 수난기에 그나마 활기를 띠는 시기를 맞이한다.

 

한글은 일제 강점기를 맞으면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 대중들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글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뜻있는 지식인들은 무식한 대중을 한글로 깨우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나라를 빼앗기자 한글이 나라의 보배임을 알게 된 지식인들

 

우리 나라가 떳떳하게 나라 구실을 할 때인 조선 시대에는 모두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대받던 한글은 일본에 나라를 뺏기게 되자 사람들이 보배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글을 지키는 것이 나라의 얼을 지키는 것이고 모두가 한글을 쓰는 것이 바로 독립 운동이 됐다. 주시경을 비롯한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을 새롭게 다듬고, 문법을 만들고, 옛 글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고쳤다. 세종 대왕이 한글을 만든 때로부터 45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고치고 다듬은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450년만에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우리 글을 다듬다

 

세계에 으뜸인 글을 450년 동안이나 버려둔 것도 세계 역사상 처음 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하고서야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우리 글을 다듬고 닦은 것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주시경을 비롯해서 최현배와 이윤재, 이극로, 이희승, 김윤경, 정인승, 이병기, 권덕규, 장지영, 안재홍, 정열모, 안효상, 정인섭, 정태진, 이중화, 김두봉, 한림, 이석린 등 많은 학자와 애국 지사들이 한글 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3. 1 운동 때도 많은 한글 학자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해서 이중화, 이윤재 등 많은 이들이 감옥에 붙들려갔다. 한글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주시경은 1908년 국어 연구 학회를 만들고 1910년대부터 한글이라는 글 이름을 쓰기 시작해서 우리 글 이름이 한글이 됐다.

 

주시경의 제자들인 장지영과 권덕규, 김윤경, 이희승 등은 1920년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고 이는 뒤에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이어진다. 1926년 조선어 연구회가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해서 가갸날로 정한 것이 훗날 한글날이 됐다.

 

1930년대 한글 운동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

 

1930년대부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10여년간은 우리 나라 한글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는 한글 연구 열기가 뜨거워서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조선어 문학을 전공한 많은 인재들이 한글 운동에 참여했고, 국내의 독립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연구회에서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꾸려졌다. 안재용과 백낙준, 이광수, 주요한,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정인보, 장지영 등 108명이 참여했다. 사상 처음으로 우리글 사전 편찬이 시작된 것이다. 그 사전은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됐다가 광복 후 1947년에 첫 출간됐고, 1991년에 한글학회에서 우리말 큰사전으로 펴내게 된다.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고, 1936년에는 우리말 표준말이 발표됐다. 그리고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도 나왔다. 그 시기에는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조선음성학회 등에서 발표된 한글에 대한 주요 논문만도 777편에 이르고 한글 연구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1936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일제가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창씨 개명을 강행하는 등 우리 말글에 대한 압제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한글 운동의 열기는 모두가 목숨을 걸고 나설만큼 뜨거웠다.

 

그러나 한글 운동이 독립 운동의 큰 축으로 돼 가자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의 최현배와 장지영, 김윤경, 이희승, 이윤재, 이극로, 정인승, 권승욱, 한징, 이중화, 이석린 등 많은 학자들을 구속했다. 그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죽거나 해방이 돼서야 풀려났다.

 

 

⑤ 식민지 시대에 피어난 한글 문학

 

한글 운동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한글 문학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1906년 이인직이 최초의 신소설 ‘혈의 루’를 발표하자 뒤이어 1908년 이해조가 자유종, 1912년 최한식이 추월색을 발표, 새로운 한글 소설들이 선을 보였다. 1908년에는 최남선이 ‘소년’ 잡지를 창간했고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 -한글 문학의 본격적인 새 역사를 쓰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한글 문학의 새 역사는 춘원 이광수가 1917년 ‘무정’이라는 최초의 장편 소설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광수의 ‘무정’은 중앙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우리 나라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한글 문학을 선보였고, 사람들을 소설의 재미에 빠지게 했다.

 

이광수가 봇물을 터뜨리자 한상윤의 핍박(1917년), 양건식의 슬픈 모순(1918년),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1919년),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0년), 현진건의 빈처(1921년)가 뒤를 이었다. 1920년대에는 김동인의 배따라기(1921년), 감자(1925년), 염상섭의 묘지(1923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년), 나도향의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1925년) 등 많은 작가들이 새 소설을 발표했다.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농촌 계몽 운동의 시대를 열다

 

1932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장편 소설 ‘흙’을 연재하자 소설의 주인공 허숭을 따라서 젊은이들이 앞을 다퉈서 농촌 계몽 운동에 나섰고, 우리 나라 문학계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심훈의 상록수가 1935년에 나와서 농촌 계몽 운동에 더 큰 불을 지폈다. 채만식의 탁류(1938년), 이상의 날개(1936년), 중생기(1937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1936년), 염상섭의 삼대(1931년), 현진건의 무영탑(1939년), 김동리의 무녀도(1936년), 황토기(1939년), 이무영의 제 1과 제 1장(1939년), 유치진의 소(1934년)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그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3. 1 운동 이후 한글로 지은 현대시도 전성기를 맞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 식민지 시대 온 국민들의 사랑을 받다

 

주요한이 봄놀이(1919년)을 발표한 이후 김소월이 진달래꽃(1922년), 이상화가 나의 침실로(1923년)을 발표했다. 뒤이어 김동환이 국경의 밤(1925년), 김소월이 산유화(1924년), 초혼(1925년), 한용운이 님의 침묵(1926년),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을 발표했다.

 

1930년대에는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1930년), 모란이 피기까지는(1934년), 백석의 정주성(1935년), 정지용의 유리창(1930년), 장수산(1930년), 등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밖에도 서정주, 윤동주, 이병기, 이육사, 이은상, 강소천 등 많은 시인들이 일제 강점기의 우리 나라 문학사를 빛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문학은 우리 나라 문학 사상 최고의 전성기

 

일제 강점기의 한국 문학은 현재까지 포함해서 우리 나라 문학 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70년 동안 일제의 탄압이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는 세상을 맞았지만 일제 강점기처럼 많은 인재들이 등장해서 보석 같은 걸작들을 쏟아내고 대중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은 적은 없었다.

 

한글이 겨우 햇볕을 본지 몇 년도 지나지 않으면서 이렇게 한국 문학이 꽃을 피웠음은 우리 말과 글에 목말랐던 대중의 바램도 간절했고, 일제에 억눌린 한이 문학을 통해서 분출됐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⑥ 농촌 계몽 운동의 목표가 된 한글

 

일제 강점기에 한글 운동의 또 하나의 물줄기는 문맹 퇴치를 위한 농촌 계몽 운동 등 한글 보급 운동이었다.

 

한글학자와 문인, 대학생들이 힘을 모아서 지방마다 한글 강습소를 차려서 한글 깨우치기에 나섰다.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은 방학 때 농촌 계몽반을 만들어서 전국 농어촌에서 한글을 모르는 농어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그 운동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앞장섰다. 1920년대부터 1935년까지 이어진 이 한글 계몽 운동은 그동안 문맹으로 살아온 많은 농민들과 도시 서민들의 눈을 뜨게 했고, 우리 나라 대중들에게 아는 것이 힘이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그 시기에 한글을 깨우친 대중은 광복 후 우리 사회에 교육열을 일으키고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이룬다.

 

 

⑦ 광복 후 1953년까지 한글이 제대로 대접받은 시기

 

한글이 떳떳하게 나라글로 대접받고 가장 활기를 띤 시기는 광복 이후부터 한국 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서 감옥에 붙들려갔던 한글학자들 가운데 최현배와 이극로, 정인승, 이희승 네 명은 일본이 항복한 이틀 뒤인 8월 17일에야 함흥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들이 풀려나던 날 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서 애국 지사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기대를 모았던 한글학자들

 

당시 한글학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맞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새 나라에서 큰일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광복 후 최현배와 장지영이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갔다. 최현배는 편수국장 겸 교과서 편찬 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최현배는 그때부터 한글 문화 보급회를 만들고 한글학자들이 전국을 돌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도록 했다. 우리말 도로살리기 운동을 시작해서 일제 때 썼던 경성을 서울로 바꾸고, 짝수와 홀수, 세모꼴, 덧셈, 뺄셈, 지름, 꽃잎, 건널목, 도시락, 책꽂이 등 우리말들을 교과서에서 되살렸다.

 

1945~53년 최현배의 시대-한글이 처음으로 제 나라 글로 대접받은 시기

 

1945년 12월 미 군정청 학무국은 최현배의 건의대로 초중등 교과서 한글 전용을 의결했다. 1945년 9월부터 다섯 달 동안 군정청은 네 차례에 걸쳐서 국어 교사 천 8백 명을 양성, 각급 학교에 배치했다. 1947년 10월에는 처음으로 조선말 큰사전 1권이 발행됐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10월에는 국회에서 한글 전용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11월에는 초중등 국어 교본이 간행됐다.

 

그 시기에는 최현배 등 한글 학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초중등 교과서에 순우리 낱말들이 들어가고 동식물 이름들도 거의 우리말로 제 이름을 찾았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순 우리말로 된 낱말들을 배우고 일반인들도 이제 새 나라에서 순우리말로 말글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짧게 끝난 아름다운 한글 나라의 꿈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만 이어지고 그 이후에는 교과서에도 한자말이 계속 들어오고 한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한글학계 안에서도 이희승, 이숭녕 등 일부 학자들은 순우리말 이름들을 거부하고 한자말로 된 이름으로 문법책을 따로 내서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맞섰다.

 

그 가운데에서도 1957년 한글 학회는 우리말 큰사전 여섯 권을 완간, 한글의 역사에 새로운 주춧돌을 쌓았다.

 

 

⑧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전용 담화와 공문서의 한글화

 

나라 안에서 이미 한글 전용 분위기가 식어가고 있을 때인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 전용 담화를 발표, 한글을 살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 과학, 실용적인 한글을 전용함으로써 민족의 권위를 되찾고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며 능률적인 주민 생활을 도모하고 한글을 민족 문화 발전과 조국 근대화 작업의 밑거름으로 삼겠다. ”고 밝혔다.

 

그 담화를 계기로 정부는 1971년부터 정부 공문서를 한글로 쓰도록 조치했고, 온 국민이 모든 분야에서 한글을 전용하도록 단계적인 실천 계획을 세워서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전용 조치는 한동안 한글 전용 분위기가 식어가던 것을 되살리고 한글이 공식적으로 공문서와 일상 생활에 뿌리내리는 데 공헌했다.

 

 

⑨ 1982년 이후 안방을 차지한 일본식 한자말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뒤바뀌었다.

 

정부는 1982, 83년 두 차례 중고등학교 교과사에 한자를 병기하도록 조치했고, 그동안 우리말로 써 왔던 많은 낱말들을 일본식 한자말로 바꿨다.

 

본격적으로 일본식 한자말 시대가 열리다

 

정부가 일본식 한자말 쓰기에 앞장서자 법조, 의료, 산업, 문화계, 전문 기술 분야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일본식 한자말 쓰기가 일상화됐고, 일본식 한자말이 안방을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일본식 한자말이 우리 말글의 주인이 된 채로 30여 년이 지나면서 일본식 한자말은 더욱 크게 늘어나서 이제 모든 분야에서 우리 말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그와 함께 그동안 사회적으로 존중받았던 한글학자들은 크게 위축됐고, 한자를 더 많이 쓰자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그 수도 크게 늘었다. 이제는 우리 글에서 일본식 한자말이 굳게 뿌리를 내렸고, 대세를 이루게 됐다. 일본식 한자말을 덜 쓰고 우리말을 쓰자는 주장은 힘을 잃고 들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형편이 됐다.

 

 

⑩ 초등학교 교과서도 한자 병기 움직임 - 또다시 암흑기로 들어서는 한글

 

일본식 한자말이 대세를 이룬 분위기에 편승, 교육부는 2014년 초중고 한자 병기 확대 방침을 발표하고 그동안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한자를 병기하겠다고 나섰다. 그에 대해서 한글학자들과 한글 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이미 한자 병기 방침을 정한 교육부는 2015년 8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한자를 병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한 달 뒤인 9월 한자 병기 문제 결정을 1년 뒤로 미룬다고 고쳐서 발표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 교육을 시키는 문제를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 검토한 뒤 결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 가능성 매우 높을 것

 

그러나 교육부 공무원들과 대부분의 공직자들, 지식인들이 한자 교육 지지자들이기에 2016년 후반기에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가 결정될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 교육을 시키지 않도록 해 온 것은, ‘ 처음으로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울 때 우리 말과 글로 읽고, 쓰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 ’ 이기 때문이었다.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말과 글을 배울 때 자기 나라 말과 글로 배워야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고, 상상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 언어학계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교육의 기본 원칙이다.

 

말과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 교과서에 한자를 끼워넣는 일은 세계의 웃음거리

 

모든 선진국들이 그 원칙에 따라서 초등학교에서는 모두 제 나라 말과 글로 가르치고 있고, 우리 나라도 초등학교에서만큼은 한자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데 언어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세계에 유례 없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어려운 한자를 끼워넣어서 가르치자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한자 병기 주장을 부추기는 사람들 중에는 한자 급수 시험으로 돈을 버는 단체들과 한자 과외로 한몫 벌려는 학원들도 한몫 끼어서 한자 교육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 선진국들이 모두 제 나라 말과 글을 갈고 닦는데 열중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 나라만이 정부가 앞장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한자 교육을 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우리 나라 말글 문화를 후진국형으로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광복 후 한국 전쟁 때까지 모처럼 내 나라에서 나라글로 대접받으면서 잠시나마 활기를 띠었던 한글은 그간 지속적인 한자쓰기 공세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초등학교에서도 한자를 가르치자는 데까지 이르러 제 2의 암흑기로 들어서게 됐다.